우리가 모든 문제의 주법인 지극히 ` 이기적인 욕심 `을 정화하기 위해 항상 부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마음이 각종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그 순간 순간의 욕심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느냐, 아니면 그 옥심들의 장난질을 깨어 있는 정신으로 지켜볼 수 있느냐가 아닐까?
` 항상 깨어 있어라! 항상 알아 차려라! `
모든 성자들은 말한다. 무엇보다 " 항상 깨어 있어라!" " 항상 알아 차려라! " 그리고 ` 이미 지나버린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서 헤매지 말고, 항상 현존하는 `지금 이 순간 `에 머물러야 한다! ` 라 고 말이다.
한 개인의 `욕심의 정화 `가 전체 현상계에 무슨 힘을 발휘하겠는가 하고 의문을 표시할지 모르나, 그것 또한 고정관념일 뿐이다. 사회를 억지로 바꿀 수 있을까? 그 또한 결국 각종 이데올로기와 제도의 개혁으로 포장된 소수의 욕심이지 않을까?
설사 그렇다 해서 우리의 삶이 바뀐다고 하여도 지금과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단지 인간의 욕심이 다른 방식을 빌려서 나타날 뿐이다. `욕심` 자체를 정화시켜야 한다. 최소한 우리는 이러한 욕심을 장난질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 현상계를 현대 학계에서는 `복합 계` 라 고 말한다. 복합 계 란 항상 요동하며 어떤 하나의 논리에 규정되지 않고 개방된 세계를 말한다. 복합 계가 요동하는 이유지는 다름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 이 쉬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욕심이 없는 현상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
멈추지 않는 인간의 욕심은 쉬지 않고 새로운 대상을 갈구한다. 또한 그 요구에 맞춰 끊임없이 새로운 제도, 제품, 이데올로기, 종교 등이 현상계에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계는 욕심을 지배하는 법칙인 `가르마의 법칙` 즉 `인과 법칙 `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이러한 가르마의 법칙의 전 과정을 완전히 파악하기에는 의식에 한계가 있다.
우리는 현상계의 여러 현상계 간의 관계를 단 하나의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우주에는 너무도 많은 원인이 있고 너무나도 많은 결과가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인간을 `주관적인 해석 `으 로 파악할 뿐이다. 이러한 요인 때문에 아무리 완벽한 설계도를 그리고 계획도를 짠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현실화되는 일이 극히 드물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이러한 복잡하고 모순적인 현상계는, 우리나라가 보기에는 너무도 미미해 보이는 아주 작은 몸짓에 의해서도 일파만파가 되어 언제든지 전체가 하루아침에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단 그것이 주변으로 공명하여 퍼질 수 있다면 말이다. 이것이 끊임없이 요동하는 현상계의 특징이다.
이러한 현상계에서 먼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상황은 계속해서 변해 갈 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순간 순간의 변화가 갖는 변화의 낌새를 `통찰` 하는 것이다. 명나라의 철학자 왕 양명 선생은 `앞날의 예측` 에 대해 물은 제자에게, " 그러한 의도 자체가 욕심의 소산일 뿐이다" 라 고 질책한 뒤, " 선악이 갈리는 순간 순간의 낌새를 잘 알아차려라!" 라 고 하였다.
미래를 알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고, 매 순간 자신의 양심에 당당한 나와 남 모두를 배려하 선택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 선택은 필연적으로 나와 남 모두를 행복함으로 인도할 것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욕심 `을 정화하여 순수한 `양심` 으 로 돌아갈 때, 그 순수한 `영혼의 밝은 빛 `은 주위에 퍼질 것이다. 그리고 빛은 또 다른 빛의 존재를 일깨울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지구 전체가 온통 빛으로 물들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한 순간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이 현상계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선 무엇보다 우리는 인류정화의 최대 적인 우리 자신의 ` 이기적 욕심 `을 정화해야 한다. 이기적 욕심들을 ` 대아 적 양심 `으 로 전환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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