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번뇌와 망상도 " 모른다! "를 다섯번을 다짐해 보세요. 그들은 당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관심을 먹고 자랍니다. 무관심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독약이 됩니다. " 나는 모른다! "라 고 선언함으로써 단박에 일체의 생각과 분별을 넘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무관심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독약입니다. `
`나는 모른다 `을 외치세요! 벌써 참 나의 평온이 느껴 지실 것입니다.
과거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없습니다. 오지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뿐입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하는 일에 마음을 모아 보십시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더욱 선명하고 생생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일체의 생각을 멈추고 침묵할 때, 우리의 내면은 환해지게 됩니다. 투명할 정도로 선명해지게 됩니다. 일체의 `알음알이 `를 초월할 때, 청정한 ` 알아차림 `이 빛나게 됩니다. 타고난 " 참 마음 "을 채기는 것이 최고의 정진입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몰고 올 수 있듯이, 한 개인이 자신의 `욕심 `을 정화하여 `순수한 마음 `으 로 돌아갈 때, 그 순수한 `영혼의 빛 `은 그 주위를 밝히고, 나아가 지구 전체를 밝힐 수도 있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내면에서 작은 혁명을 일으켜 보자! 우울하고 현실이 힘들 때는, 곧장 "감사합니다 "를 5분만 마음속으로 암송해 보세요. 다른 생각이 일어날수록 더욱 힘껏 암송해 보세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는 느낌을 실감 나게 상상할 수록 더욱 효과가 좋을 것입니다. 눈이 밝아지고 마음이 가벼워지며 가슴이 벅차 오를 것이며 머리털이 서는 느낌을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떠한 번뇌, 망상도 "모른다! "를 당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관심을 먹고 자랍니다. 무관심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독약이 됩니다. " 나는 모른다! "라 고 선언함으로써 단박에 일체의 생각, 감정, 분별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지금 힘들고 초조하고 불안하십니까?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겐 흔들리는 마음이 있듯이, 늘 고요하여 흔들리지 않는 마음도 있습니다. 잠시 자신의 `이름 `만 잊고 푹 쉬어 보십시오! 푹 쉬는 그 마음, 바로 그 자리입니다. 느끼고 쉬기만 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힘들지라도 내면의 늘 고요한 ` 중심 `에 안주할 수만 있다면, 무한한 평온과 긍정과 에너지가 마구 터져 나올 것입니다. 이 무한한 힘을 온몸으로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 이상의 희열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본래 자리는 이름이 없습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텅 빈 각성 ` 일 뿐입니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것이 진실로 이 `텅 빈 각성 `을 말하는 것이라면, `아트만 `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우리의 `경험적 자아 `는 살아온 기억, 무수한 선택의 결과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러한 에고 를 대표하는 우리의 `이름 `을 잠시만 망각하고 존재해 보십시오. 우리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자아(참나, 양심) `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잠시 자신의 `이름 `을 잊고 존재해 보면, 나와 남을 가르지 않고 하나로 느끼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 상태를 유지하며 나와 남 모두가 " 행복하다! "라 고 선언하고 실감나게 느껴 보십시오. 나와 남 모두의 행복을 기원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최상의 참선 `은 마음을 텅 비워 고요하게 하는 것 아닙니다. 본래 고요하여 움직일 수 없는 ` 알아차리는 자 `를 곧장 되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왕국은 눈에 보이는 것들로 오지 않는다 ` 또한 " 보라, 여기에 있다! "거나 "거기에 있다 "하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실 "하느님의 왕국은 그대들 가운데 있습니다. `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좋다, 싫다 가르는 마음을 곧장 무시하고, 통으로 수용하며 삶은 그대로 청정할 뿐입니다. 이런 삶을 승산 스님은 " 오직 모를 뿐! ' '오직 할 뿐! '이라고 하셨고, 대행 스님은 " 주인공에게 믿고 맡기는 삶! "을 강조하셨으니 한번 따라해 보는 것이 유리하지 아니 할 까요? 홍익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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