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설과 음력설의 역사가 궁금합니다. 경기가 안 좋아서 예년만큼 흥겨운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고향을 찾는 귀성길은 올해도 긴 줄을 이으며 민족대이동의 장관을 연출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보죠.

그런데 새해 첫날을 두 번 맞이해도 괜찮은 걸까요?
우리가 새해 첫날을 두 번 맞는 것은 물론 양력설과 음력설을 모두 쇠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으로 본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게 맞습니다. 정부에서도 그런 방향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고, 오늘날과 같은 이중과세 현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우리 민족이 겪은 시대적 아픔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달력 표기법을 음력에서 양력으로 전환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였습니다.
갑오개혁은 신분제 등 전근대적인 요소를 척결하고 양력 사용 등 근대적인 제도를 도입한, 우리 역사에서 근대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반 백성들이 이 갑오개혁에 대해 강한 저항감을 표출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이 갑오개혁을 이끈 대신들이 김홍집, 박영효 등 친일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일본은 동학운동을 일으킨 농민들을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했고, 더 끔찍하게도 궁궐에 난입해 왕비 민씨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일본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개혁을 백성들은 개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특히 갑오년 11월 15일,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이 내리자 전국의 유학자와 백성들은 이를 날벼락으로 받아들이고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 11월 16일, 음력에서 양력으로의 전환 정책을 발표했습니다.
그래서 음력 11월 17일이 양력 1896년 1월 1일로 바뀌었습니다.
하루 사이에 연이어 발표됐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발령과 양력 전환을 같은 조치로 받아들였고, 양력은 친일파들이나 사용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자 총독부는 강압적으로 양력을 강요합니다.
특히 음력설을 쇠는 것을 엄격하게 처벌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음력설을 쇠는 것은 곧 항일독립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해방이 된 뒤 우리는 잃었던 많은 것을 되찾았는데,사람들은 음력설도 그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양력설을 쇠는 사람들과 음력설을 쇠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음력설은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편했지만 대부분의 시장과 상점들이 문을 닫고 거리는 휴일과 같은 풍경을 연출했지요.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온 것은 제5공화국 전두환 정부 때였습니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짓누르고 집권한 전두환 전대통령은 무언가 환심을 살 정책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내놓은 정책 중 하나가 바로 음력 설날을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 아래 공휴일로 정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양력설을 쇄온 사람들까지도 대거 음력설을 쇠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1989년에는 명칭도 설날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부터는 양력설인 신정 휴일은 1일, 음력설인 설날 휴일은 3일로 정해서 대세는 음력설로 완전히 기울었습니다.
하지만 설날과 신정, 명칭은 다르지만 그 의미는 똑같이 새해 첫날을 가리킵니다.
논리적으로만 보면 둘 중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기형적인 상황, 그 자체가 우리 민족의 비틀린 근대사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고,
아직도 그 비틀림이 바로 잡히지 않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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