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삶에 대한 통찰력과 인생 조언은?
인생에서 가장 큰 고난은 우리가 얻고자 노력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무엇인가 얻기 위해 장애물을 뛰어넘거나 치우고 00이고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것이야 말로 가로막는 고난의 정체였다. 보람 없는 날들의 반복으로 최후의 목표가 달성될 리 없다. 위대한 인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장을 통해 만들어진다.
※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 십니까?
인생의 진리를 담은 짧은 글이나 격언 잠언을 아포리즘이라고 한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니체의 철학과 헤세 의 프로이트와 카를 융의 심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는 평생 동안 11권의 책을 썼고 그중 생전에 출판된 저서는 8권이라고 한다. 괴테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만 페이지가 넘도록 일기를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썼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 철학자라고 하는데, 그의 언어가 날카롭고 독하기는 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이라 기 보다. 지나치게 현실적이라고 느껴졌다.
오히려 그의 말에서 많은 위안과 힘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인생은 고통이고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되고 따라서 집착을 버려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철학은 해복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갇혀 오히려 불행하게 사는 현대인에게 어떻게 살아야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알려준다. 그가 세상을 떠 난지 15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는 오늘날까지 그를 기억하고 그가 남긴 글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쇼펜하우어를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생각은 같을 것이다.
1. 누구나 자신의 산에 오르기를 꿈꾼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산에 오르기를 꿈꾼 자만 등산의 기쁨은 정상을 정복했을 때이다. 그러나 최상의 기쁨은 험준한 산을 기어올라가는 순간이었다. 길이 험할수록 가슴이 설렌다. 인생에서 고난이 사려졌다고 생각해 보면 그보다 삭막할 수는 없으며 우리는 산에 올라야만 한다. 젊음은 그 자체가 거대한 산이기도 하다. 그 산이 평지가 되기 전에 최선을 다해 올라야 한다. 젊은 시절에 자신의 산을 오른 자는 늙어서 산의 풍성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산에 오르기를 꿈꾼다. 어떤 사람은 그 열망이 지나쳐 병이 되기도 한다. 산에 오르기 란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올바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실패하기도 한다. 성공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성공을 시기한다. 시기의 끝에 헛소문을 퍼트리고 중상모략을 시작한다. 이런 방법으로는 절대로 그보다 빨리 산 정상에 도달하지 못한다. 자기 능력과 체력을 고려하지 않고 단숨에 뛰어오르려는 사람도 성공하지 못한다.
일시적으로 남보다 빠를지 모르나 시간이 지날수록 뒤쳐진다. 산에 오르고 싶다면 자기 능력이나 체력보다 무리해서도 안된다. 정상을 향해 바라보며 한 눈 팔지 말고 묵묵히 걸음을 옮겨야 한다. 너무나 평범한 방법이지만 이것이 산을 무사히 정복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인생이 고달파지는 까닭은 경제적 성공이 행복의 근본 요소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고 성공이라는 감정이 인생을 즐기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청년시절에는 존재감이 미미했던 화가가 중년 이후 자기 재능을 인정받음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 돈의 힘으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돈으로 산 행복에는 한계가 있다. 성공은 행복을 부르는데 지불되는 한 가지 요소임에는 분명하지만 성공을 위해 다른 무엇을 희생시킨다면 성공을 제값 보다 더 비싸게 주고 구입하는 셈이다. 누구의 도전이 가장 영광스러울까?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산 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좌절이 없다. 영광도 없다. 그래서 실패할 때마다 조용히 묵묵히 다시 일어난 사람에게는 영광이 주어진다.
그에게는 좌절을 떨치고 일어났다는 아문 상처가 새겨져 있으며, 절망의 끝이 어디쯤 인지 알고 있는 눈동자자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큰 고난은 우리가 얻고자 노력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장애물을 뛰어넘거나 치우려고 하지 않았다는데 있고 그것이야 말로 우리의 앞 날을 가로막는 고난의 정체였다. 인내를 그대 의복으로 삼아라. 의복을 벗고 다니는 것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인내를 벗지 않는다면 수치를 당할 일도 없을 것이다. 신념을 그대 양식으로 삼아라.
육신의 굶주림으로 고통받지 않게 될 것이며, 신념을 잃은 인간처럼 불행한 인간은 없다. 실패하고 낙오하는 자들은 대게 참을성이 부족하거나 신념을 갖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던 사람들이다. 시간이 항상 우리를 기다려 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게을리 걸어도 언제 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날이 오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하루하루 전력을 다하지 않고는 그날의 보람은 없다. 보람 없는 날들의 반복으로 최후의 목표가 달성되리 없다. 위대한 인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장을 토해 만들어진다.
2.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
추종과 아첨을 우정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이야 말로 우정에 대한 모독임에도 많은 사람이 우정을 확인하는 선으로 추종과 아첨을 바란다. 그렇다면 임 그 사람의 인생에서 상대방과의 친밀함은 우정이라는 성격이 아니다. 그는 지배를 원하고 있다. 진정한 집에는 지위라는 권력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칭찬과 선망만으로 나의 권리가 확보되는 것도 아니고 내게 주어 지는 것도 아니다. 지방 당하고 싶지 않다면 나를 지배하는 자와 똑같이 행동하면 된다. 그게 빠른 길이다.
여기에는 망설임도 절제도 없어야 한다. 지배당하고 싶다는 심리와 지배하고 싶다는 삐뚤어진 욕망이면 충분하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문이다. 나의 불행을 타인에게 이야기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따 적과 동지를 구별하면 된다. 인간관계에서 돈은 진실을 확인하는 창이다. 돈을 빌려달라는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친구를 잃게 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경우 돈을 빌려줌으로써 친구를 잃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최고의 친구는 한없이 적에 가까운 친구다. 충고가 필요할 때 조언해 주고 교만 해졌을 때 나를 위협하는 친구가 있다면 부모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받는 것과 비교할 만하다. 인간의 특수한 성격은 이중성이다. 충고가 필요한 사람일수록 간섭을 싫어하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일 수록 동정을 증오한다. 그 결과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탄생했다. 각각의 민족이 싸아온 역사를 보건대 전재와 바란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위로와 충고가 역사에 기록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날들은 자만했던 날들로 기록되고 배불리 먹고 마셨던 시기는 사치와 향락으로 오욕되기 일쑤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 스스로 반목을 추구했다는 뜻이다. 인간에게 평화는 지루함의 극치다. 행복한 순간은 지긋지긋한 권태로 기억되고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던 시절은 강인한 인간성을 확인시켜 준 영웅들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한다. 역사는 개인의 시간들이 한데 모인 기록이다.
3. 우리가 사소한 일에 위로를 받는 이유는 사소한 일에 고통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소한 일을 위로를 받는 이유는 사소한 일에 고통받기 때문이며, 신을 안다고 말하는 자 중에 신을 사랑하는 자가 극히 적은 이유는 형식과 진실의 거리가 비교도 안될 만큼 멀기 때문이다. 행복을 손에 넣고 싶다면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행복 이외의 어떤 것을 추구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의 말은 나 혼자 만의 행복은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타인의 행복 인류의 진보, 문명과 예술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다고 모두 거짓말이다.
그들의 수고는 지극히 개인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노력이다. 행복은 수단을 통해 얻어지지 않는다. 어떤 목표를 향해 실천을 했을 때 길의 중간에서 우연찮게 얻은 물 한목 음 같은 것이다. 깃발이 꽂혀 있는 종점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다. 행복이라는 깃발을 얻기 위해 어디선가. 누군가와 무엇인가를 실천하고 있다면 그의 삶은 진정한 행복을 만끽하지 모 하게 될 것이다.
4. 아파하고 싶지 않다면 아픔과 친해져야 한다.
사람과의 관계를 보다 원활하게 이끄는 힘은 지속적인 우정에서 나온다. 우정의 성격은 차분한 한결같음이다. 변한다면 그럿은 우정이 아니다. 들뜬다면 그 또한 우정이 아니다. 변하는 것은 계산이며 들뜨는 것은 사랑이다. 내 친구는 그곳에 있고 나는 이곳에 있다. 그 친구가 그곳에 있듯이 나는 이곳에서 할 일이 있다는 마음의 여유와 가치관이 우정의 정의다. 우정은 언제 눈금이 달라 질지 모르는 저울이며 흥분이 가라앉은 뒤에 찾아오는 배신감이다. 우리는 친절과 우정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친절이 그의 인격에 대한 감탄이라면, 친구의 영혼을 위한 헌신이다.
감탄은 그의 그림자를 발견하는 동시에 사라지지만, 헌신은 그의 그림자를 바라봄으로써 더욱 애잔해진다. 친절히 상대방의 감사로 만족한다면 우정은 친구의 행복으로 만족한다. 우정은 두 개의 영혼을 지니고 있다. 우정의 영혼을 가진 자는 두개의 영혼을 가진 자다. 한 영혼이 쓰러 지더라고 곁에 있는 또 다른 영혼이 그를 일으켜 세운다. 어떤 경우에도 함께 쓰러지는 법은 없다. 삶이 인간에게 우정을 선물한 까닭이다. 우정은 다른 어떤 감정보다 인간을 현명하게 만든다. 우정만이 인간과 사물의 세상을 보여주며 인간다운 정당하나 삶과 방법을 말해 준다.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생각하기 전에 내가 무엇과 친해져야 하는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어떻게 살겠다는 소원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그것을 위해 살고 싶다는 바람이 인간에게는 그것이 더 크고 위대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정은 겉으로 나타나는 고상한 만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의 내면에 자극이 되고 분발하려는 촉진제가 되어야 한다. 한껨 진보하지 않는 우정은 나태와 방종이다. 내적인 진보는 강렬한 영혼의 동요로부터 시작된다. 우정은 친구의 영혼을 깨우는 자명종이다. 그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 우정은 자기 본 위에 나르시시즘에 가깝다.
참 다은 우정을 부러워하면서도 일상에서는 소모적인 만남을 반복하는 이유는 잠에서 깨어나는 영혼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긴 잠에서 깨어난 나의 영혼이 무감각과 무지, 게으름으로 얼룩진 나 자신을 보고 절망할 까봐 두려운 것이다. 인생이 당신에게 축복으로 남기를 소망한다면 당신이 먼저 인생을 사랑해야 한다. 친해지고 싶다면 당신이 먼저 다가서 마음을 보여줘야 한다. 아파하고 싶지 않다면 아픔과 먼저 친해져야 한다. 나를 사랑한다면 내 영혼이 바라는 모습과 친해져야 한다.
5. 인간의 불행 중 상당수는 혼자 있을 수 없어서 생기는 일이다.
사교성이란 지성과 반비례하며 그 사람이 매우 비 사교적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면, 위대한 특성을 지닌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적인 사람은 고독으로 두 가지 이점을 얻는다. 첫째는 자기 자신과 함께 할 시간을 얻고, 둘째는 타인과 함께하지 않을 자유를 얻는다. 교제에는 많은 강제와 고충 위험이 따른다. 인간의 불행 중 상당수는 혼자 있을 수 없어서 생기는 일이다. 사교성은 도덕적으로 멀어지고 지적으로 우둔하거나 불합리한 사람과 접촉하게 만드는 성격이다. 위험하고 해롭다.
비 사교적이라는 말은 사교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므로 그 자체만으로 행복이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뇌는 교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건강 다음으로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마음의 평정이 사교 때문에 위험해진다. 고독이 없었다면 인류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음식을 절제하면 몸이 건강해지 듯, 사교를 절제하면 영혼이 건강해진다. 문제는 인간이 고독에서 태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서 태어날 때 혼자가 아니었다.
부모가 있고 형제자매가 있고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의 소유물로 탄생했다. 어쩌면 고독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경험과 관념으로 만들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교제에서 무엇을 얻겠는가?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자신의 본성이 깃든 가장 저급하고 비열한 부분, 즉 일상적이고 비열한 부분을 매개로 끄집어낼 수밖에 없다. 공동체는 말 그대로 공동의 가치관과 동질성이 있어야 하는데 모든 인간이 같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집단의 정신 수준을 가장 어리석은 자에게 맞춰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회성은 타인의 높은 수준에 맞춰 나를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가장 낮은 수준에 맞춰 나를 떨어뜨리는 행위가 된다. 공동체를 존속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저급한 인격을 고상한 인격으로 교육하기보다는 고상한 인격을 저급한 인격을 흉내 내게 만드는 것이다. 고립과 고독은 아마도 이런 사회구성이 질려버린 인간의 영혼이 살기 위해 창안한 고급스러운 감정일지도 모른다.
6. 다수는 그저 많은 숫자일 뿐, 많다고 정의가 되는 건 아니다.
인생의 진리는 없다. 삶은 어리석은 동화일 뿐 그래서 나는 실망하지 않는다. 세상은 내가 틀렸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세상이야 말로 내 눈에는 전부 실수와 오류 투성이다. 오류와 허위로 둔갑한 것들이야 말로 진실이고, 신성으로 과장된 것들이야 말로 진짜오류다. 옳고 그름 따윈 없다. 다수는 그저 많은 숫자일 뿐, 많다고 정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저급을 무력하다는 편견으로 뒤집어 씌우는 것에 반대한다.
윽박질러도 따라가지 않겠다. 그것이 도덕이라도 듣지 않고, 여기가 내 한계라고 한다면 한계라는 시물을 결정하는 건 오직 아의 의식뿐이라고 가르쳐 줄 것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고 모를 것도 없다. 인간은 결국 자신만을 체험할 뿐이다. 나는 한 가지 마 있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인생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평가 새로운 개헌성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 죽음은 그에게 꼭 필요한 순단에 이루어진다.
어린아이가 어쩔 수 없이 어른으로 성장하 듯, 죽음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의 이성이 우리의 현실보다 항상 앞서나가고 더 많은 충동이 휩싸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의 현실이 우리의 이성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뜻이다.
7. 인생에서 "죽음 "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아직 이르다고 생각들 때 죽음은 찾아온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망상이다. 행복은 희생을 요한다. 상실 없이는 기쁨이 없고, 절망 없이 진리에 대한 감지도 없다. 고통과 쾌락은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두 마리 뱀의 형상이다. 한쪽의 고통으로 다른 한쪽의 고통이 시작되고, 고통이 더 심해질수록 서록의 꼬리를 무는 힘도 강해진다. 삶과 죽음도 그와 같아서 삶에 더없이 집착하는 자에게 죽음은 더 빨리 찾아오고 오히려 죽음을 기다리는 자에게 삶은 더욱 긴 시간을 펼쳐 놓는다.
불명확한 인생에서 죽음보다 확실한 사실은 없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는 사실보다 명확한 전제는 없다. 죽음이 다가온다는 명확한 사실은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올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보다 해가지면 어둠이 찾아 온다는 눈으로 목격한 사실보다 겨울이 가면 따뜻한 봄날이 시작되리라는 부품 기대보다 더욱 명확한 진실이다. 그러나 사람은 내일을 준비하고 어둠을 대비해 거실에 불을 밝히고, 봄을 기대하며 두꺼운 털옷을 정리해도 내일 찾아올지 아니면, 잠시 후 찾아올지, 혹은 내년 봄에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세우지 않는다.
우리는 항상 죽음을 떠올려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삶이 허락된 이유임을 깨달어야 한다. 우리는 죽기 위해 태어난 자들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죽음의 준비는 오직 이것뿐이다. 더 나은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 두려움과 아쉬움과 남겨진 사람들의 걱정에 눈치만 보던 우리에게 우리들이 당당하게 죽음과 대면하여 공포도 후회도 근심도 없음을 확인시켜주는 것, 보다 나은 삶이 우리를 죽음으로 부 터 지켜주는 유일한 보호막을 기억해야 한다.
이 것이 좀 더 죽음에 대해 의연하게 숙명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공허와 암흑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공허와 암흑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도체에 흩어져 있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체적 죽음은 공간에 속한 육체와 시간에 대한 인지를 소멸시티지만, 삶을 이루는 기반 즉 세계와 존재 사이에 이룩된 특수한 우정은 깨뜨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죽음이 우리에게 선물한 고통에 감사해야 한다. 고통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이성은 쓸모가 없다. 고통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걸어가야 할 필수 과정이다. 절대로 사라질 리 없는 유일한 길이며 그 끝에 죽음이 있다. 죽음이야 말로 우리를 완성하는 강력한 본성인 것이다.
8. 자신이 증오스러울 땐 자는 것이 최고다.
하루를 마치고 조용히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다. 지나간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 속에서 얻어지는 감정은 나의 무능과 타인에 대한 분노 결국 또다시 우울해진다. 나의 한계에 분노하고 타인에 대한 원망으로 불쾌감은 치솟는다. 그 마음이 나를 어둠 속에 갇히게 한다. 모두 피로에서 오는 것이다. 삶에 지쳐버렸을 땐 냉정한 반성이 불가능하다. 억지로 반성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우울이라는 덫에 걸려버린다. 지쳤을 땐 반성하는 것도 지겹고,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는 것도 지겹고, 일기 같은 것 쓰는 것도 괴롭다.
삶이 활기차거나 기쁨으로 활동하거나 어떤 일에 흠뻑 빠져 집중할 때는 지나간 일을 되돌아보지도 바성하지도,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거나 계획을 세우지도 않는다. 반성하고 있다는 것은 지나간 것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다는 것이며, 자신을 한심스레 여기고 있으며, 타인을 증오하는 중이고 영혼과 육신에 휴식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반성은 자기 협 오이며, 인간이 반성할 때 뭔가 반성할 만한 건수가 없는지 찾아보게 된다. 월 해도 기운이 나지 않을 때, 인간은 무턱대고 반성하며 자아를 성찰한다. 그럴 바에는 아무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드는 편이 났다. 기도, 명상도 도움이 안 된다. 잘 먹고 잘 자고 일찍 이어는 것이 협 오를 극복하는 비책이다.
8. 오직 질문을 통해서만 성장한다.
고달프고 덧없는 인생이 쳇바퀴처럼 돌아간다. 우리는 늘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 인가? 인간은 질문을 통해서 이유와 목적 그 속에서 얻어지는 의미와 가치를 얻고자 노력한다. 철학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와 그 이유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그 전에 궁국적인 목표가 과연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묻고 답을 내리는 모든 행위가 철학이다. #행복은 어쩌다가 물 한 목 얻은 것과 같다. 인간의 불행은 혼자 있지 못해서 부 터 발생한다. 죽음, 고통. 증오, 정의/감사합니다.